홍주이씨 해풍군파(海豊君派)

배경

인터넷에 보이는 일반적인 홍주이씨 자료는 남쪽에 있던 후손들의 옛족보에 근거한 것이라서 해풍군파는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잘 아는 문간공 이서의 두 아들 직장공 이신지와 정당공 이신유 가운데 이신유의 후손들이 남한에서 기록을 보존해왔고, 오히려 장남인 직장공 이신지 쪽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육이오 동란 때 남쪽으로 온 해풍군파 후손들이 족보를 가져와서야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 나는 32세손으로, 30세손인 이환신 할아버지는 오랜 대대로 독자이셨으므로 주변에 친척이 많지 않았다. 당시 가장 가까운 친척이 20촌을 넘는 분이셨고, 그중 서당 훈장도 하신 '새간집 할아버지' 이상순씨가 글 잘 쓰시는 분으로 집안 족보를 맡아 정리하셨다고 한다. 이분이 평안도 강동군에 사시다가 동란 때 후손들이 피난 내려오시며 족보를 들고 왔고, 결국 남쪽의 홍주이씨 종친회와 연락하여 남쪽의 유실되거나 부정확한 자료도 보완이 되었다고 한다. 이 페이지에 있는 사진들의 30세 까지의 기록은 바로 이 분의 글씨이다. 1920년대에 재정리하여 펴낸 것이다. 내가 가진 족보에는 1989년에 추가한 제 6권이 추가되어 있다.



[해풍군(海豊君: 이사손) 자손 분파도]


[찬성공(贊成公: 시조 이유성) 자손 분파도]


해풍군파(海豊君派)의 평양 정착

13세 해풍군 이사손(似孫)은 문간공(1332-1410) 이서의 장남 직장공의 아들이었다. 족보에는 문간공의 묘 앞에서 30보 떨어진 곳에 지석이 있다고 한다. 해풍군 사손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장남 이이(苡)는 진사(進士)로, 자손들은 평양성 밖에서 살며 외성파(外城派)로 알려져 있었다. 묘소는 평양 화원(花原)이 있다고 기록. 나도 어려서 외성파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초시 합격자도 없었고 족보를 유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둘째인 선전공(宣傳公)이천(薦)은 선전관으로 형제 중 유일하게 벼슬을 했다. 묘는 청운산에. 셋째 이위(蔿)의 후손들은 자산파(慈山派)라 한다. 14세손인 이 분 부터 20세 까지 대부분 평안도 자산에 묘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세손에는 정육품 관직을 지낸 이도 나왔으나, 21세손의 두 아들 이름을 끝으로 족보에 더 이상 기록이 없다. 즉, 외성파와 자산파는 기록이 끊겼고, 둘째 아들인 이천의 후손들이 해풍군파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해풍군의 아들들인 14세손들이 평양 지방으로 이주한 것이라는 기록이 된다.

이천의 후손으로, 15세손 이개지(盖地)는 무공랑(務功郎, 정7품)을 지냈으며 묘는 청운산, 16세손 이종형(従蘅)은 의교랑(宜敎郞, 종6품)을 지내고 묘는 강동 원당방 권당리 입암산(江東元堂坊權長里立岩山)에 있다 한다. 권장산도 근처에 있을듯. 17세손 아들 셋의 후손들은 관직을 하며 양반의 명맥을 이어갔다. 17세손 중 차남인 이석종(碩種, 1470-?)은 정략장군(定略將軍, 종4품)을 지냈으며 묘가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권장산(權長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세손 이춘문(春文, 1494-?)은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다섯 아들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듣던 다섯형제 이야기가 이분들이었을 것이다. 해풍군 자손 분파도에도 이 다섯 형제가 나온다. 17세의 다른 두 분의 후손들도 많이 있다. 다섯 형제중 네명도 주요관직에 있었으므로 집안이 비교적 융성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5형제중 이희방(希芳)의 후손

특히 우리 집안에서 다섯 형제 이야기가 중요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 이후로 나의 분파에 연속으로 오랫동안 독자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집안에 중요한 전설이 있다. 이춘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중에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와 같이 활동했던 분(아마도 다섯째 중 막내)으로 부터 명당 자리를 받아오게 된다. 그런데, 그 심부름을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잘 찾지 못하고, 나름대로 최대한 좋은 자리를 잡았다. 원래 자리는 3대 정승이 나는 자리인데, 이 사람이 잡은 자리는 12대 후에 3대 정승이 나는 자리였다고 한다. 이 사람은 후에 벼락 맞아 돌아가셨다는 전설이... 족보에 나오는 묘지 위치도

이런 전설 때문에 바로 12대 째였던 나의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벼슬길을 가도록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히 집안의 관심과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망해버리자, 증조할아버지는 아들과 집안의 미래가 막힌 것으로 생각하고 아까워 우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하에 신교육 받고 면서기가 되었더니 벼슬한다고 좋아하셨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면서기는 오래 하지 않았고, 삼일 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가출했으니, 10대 독자의 부모 마음이 아주 무거웠을 것이다.

나라의 정승은 아니지만, 할아버지는 감리교 목사님이었고 한국 감리교회 전체 감독도 역임 하셨다. 당시 선각자로, 1930년대에 미국 벤더빌트 대학에서 신학 학사, 그후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하셨다. USC에서의 박사 공부를 시작하셨으나, 6.25 동란이 터져 중단하고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훗날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그리고 현재 2대와 3대째 합쳐 6명의 박사가 나왔고 3대째 대학 교수가 있으니, 비록 3대 정승은 아니더라도 집안을 바로 세우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평양 근처 강동군에는 홍주이씨들이 많이 있었고, 이들은 족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족보가 유실되어 정확한 집안 내력을 모르는 소위 "외성파"가 있었다. 강동군에는 선산들이 있었는데, 권당산(일명 건뎅이)과 지장산이라는 이름들을 들어봤다. 해마다 모여 시제를 지냈다고 한다. 박덩골이라는 지명도 거론되었다. 이제 이를 기억하는 세대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도 그저 어려서 듣던 이름들을 적어내는 것 뿐이다. 지금은 물론 다 사라져 없어졌을 것이다.

  • 18세 이춘문(春文) 1494생 통정대부를 지냈다.
  • 19세 이희방(希芳) 1556생 5형제중 넷째. 통정대부를 지냈다.
  • 20세 이승호(承浩) 1607생 2형제중 하나. 형 이승단과 달리 벼슬이 없었다.
  • 21세 이후목(後牧) 1632생 독자. 건지산(墓在乾芝山)에 묘가 있다고 한다.
  • 22세 이응염(膺琰) 1654생 동생이 요절하여 독자. 처음으로 권장산에 묘가 있다 (墓在權長山).
  • 23세 이만형(萬亨) 1682생 독자.
  • 24세 이광??(光??) 1726생 독자. 묘소는 구절봉(九莭峯)
  • 25세 이송신(松臣) 1746생 독자. 구절봉. 할머니 묘소는 박정골(朴丁洞 - 박정동). 평안도 발음으로 박덩골.
  • 26세 이??대(??大) 1764생 독자. 박정골.
  • 27세 이달백(達白) 1791생 독자. 박정골.
  • 28세 이석련(錫連) 1832생 독자. 박정골. 요절하여 할머니가 어린 아들 대리고 굶어죽도록 고생. 아들이 집안을 다시 세움. 며느리 시집살이 심하게 시킴.
  • 29세 이은순(殷淳) 1864생 독자.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나, 평양근처 지장산에 묘를 썼다고 들었다. 애가 안생겨 얻은 서자 환걸이 있었다. 할머니는 김해김씨 1867년생.
  • 30세 이환신(桓信) 1902-1984 독자. 10대 독자. 평양 요한학교 교장. 감리교회 감독. 연세대 교수. 감리교신학교 교수. 연세대 이사. 연세대 명예박사. 할머니는 수안 이씨 이명주 (1902-1989).
  • 31세 이상섭(商燮) 1937생 차남. 미국 에모리대 박사.
  • 32세 이기활(基活) 1971생 차남. 미국 일리노이대 박사. (필자)
  • 33세 이예호(禮鎬) 2001생 Annette. 여(女). 미국 브라운대 재학.
  • 33세 이선호(善鎬) 2003생 Benjamin. 자(子).

    19세 이희방 할아버지 이후로 10대가 넘도록 나라에서 벼슬을 한 적이 없다. 게다가 10대 연속의 독자로 후손도 많지 않다. 가계가 끊어지지 않은게 놀라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