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이씨 해풍군파(海豊君派)배경인터넷에 보이는 일반적인 홍주이씨 자료는 남쪽에 있던 후손들의 옛족보에 근거한 것이라서 해풍군파는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잘 아는 문간공 이서의 두 아들 직장공 이신지와 정당공 이신유 가운데 이신유의 후손들이 남한에서 기록을 보존해왔고, 오히려 장남인 직장공 이신지 쪽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육이오 동란 때 남쪽으로 온 해풍군파 후손들이 족보를 가져와서야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 나는 32세손으로, 30세손인 이환신 할아버지는 오랜 대대로 독자이셨으므로 주변에 친척이 많지 않았다. 당시 가장 가까운 친척이 20촌을 넘는 분이셨고, 그중 서당 훈장도 하신 '새간집 할아버지' 이상순씨가 글 잘 쓰시는 분으로 집안 족보를 맡아 정리하셨다고 한다. 이분이 평안도 강동군에 사시다가 동란 때 후손들이 피난 내려오시며 족보를 들고 왔고, 결국 남쪽의 홍주이씨 종친회와 연락하여 남쪽의 유실되거나 부정확한 자료도 보완이 되었다고 한다. 이 페이지에 있는 사진들의 30세 까지의 기록은 바로 이 분의 글씨이다. 1920년대에 재정리하여 펴낸 것이다. 내가 가진 족보에는 1989년에 추가한 제 6권이 추가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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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이유성(李維城)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려시대의 역사책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215년(고종 2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에 모두 비슷한 내용으로 등장하는데, 연도별 기록을 알아보기 쉬운 고려사절요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명종 9년인 1179년 3월이다. 이 당시 문신인 정국검의 사위로 등장하여 불량배를 잡아들였다.수정봉의 도적을 체포하다고려사에도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 내시 이유성(李維城)과 영동정(令同正) 최겸(崔謙)에게..."라고 관직이 나온다. 이 당시 내시는 조선시대 환관과는 다른 것으로, 국왕 가까이에서 제반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장인인 정국검도 한때 내시였다. 이름이 먼저 나온 것으로 보아 첫 사위였을 것이다. 이 때를 대략 20세로 잡는다면, 사망한 1215년에는 55세 정도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 인물편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이유성무신집안 출신으로 공을 세우고 벼슬도 잘 했으며, 의리도 좋은 인물로 나온다. 말년에는 서경(평양) 시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마지막에 스캔들이 가득하다. 관기에게 현혹되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이야기. 이게 따로 기록될 정도라면, 당시 소문이 많이 났던 모양이다. 1211년 12월에 왕준명이 희종과 짜고 최충헌을 제거하려 했다가 실패한 사건이 여기 언급된다. 고려사절요에는 사망한 이야기가 따로 실려있고, 간략한 소개가 함께 있다. 여기에는 관기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이유성(李維城)이 사망하였다. 이유성은 일을 만나면 강단이 있고 과감하였다. 왕준명(王濬明)이 화를 입던 때에, 동생인 정언(正言) 왕경의(王景儀)가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친구들도 두려워 하여 아무도 감히 전송하지 못하였다. 이유성은 당시 산기상시(散騎常侍)였는데, 옛 친구라 하여 홀로 사람을 보내 전별하고 노잣돈으로 은(銀) 30냥을 보내 압송하는 아전[押吏]에게 전하게 하여, 핍박하는 것을 관대하게 할 수 있었다. 왕경의가 감격이 지극하여 목이 메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무신으로의 활동상이 소개된 것은, 위에 나온 전라도, 한산군을 지킨 것이외에 반란군 토벌에 대한 것이다. 경주 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내세우며 1202년에 일어난 반란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아서 결국 중앙군이 파견되었다. 정언진(丁彦眞)은 신종(神宗) 5년(1202)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지자심(池資深)이 아뢰기를, “경주의 적도(賊徒)들이 항복을 요청하였으니 반드시 군사를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최충헌(崔忠獻)이 노하여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로, 형부시랑(刑部侍郞) 전원균(田元均)을 부사(副使)로, 대장군 최광의(崔匡義)를 좌도사(左道使)로,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이(李頤)를 부사로, 섭대장군(攝大將軍) 강순의(康純義)를 우도사(右道使)로, 지합문사(知閤門事) 이유성(李維城)을 부사로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해 토벌할 것을 서둘렀다.이 때 벌인 작전 중에 이유성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있다. 적들이 기계현(杞溪縣)을 노략질하자 이유성(李維城)이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니 적의 우두머리 패좌(孛佐)가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살펴보고는 도망하려 하였다. 장군(將軍) 방수정(房秀精)이 두 아들을 데리고 먼저 올라 힘을 다해 공격하자, 사졸(士卒)들도 그 틈을 타 〈적의 머리〉 1,000여 급(級)을 베고 250여 명을 사로잡았다.결국 1202년에 일어난 반란이 1204년이 되어서야 잠잠해진 모양이다. 경주 토벌군의 전공을 포상하다족보에는 정당문학, 찬성사, 서경부유수를 지낸 것으로 나온다. 평양에서 돌아가셨으니, 그곳에 묘자리가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보인다. 홍주 이씨 시조는 유성(維城). 1081년 개경(현 개성)에서 출생해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낸 무관이면서 유교에도 뜻이 깊었으며 '안평(安平) 이씨 시조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사실 11세 문간공 이서의 출생년(1332년)을 기준으로 10세대를 1215년에 사망한 이유성 사이에 짜아 넣기는 힘들다. 정국검의 사위일 때의 일화로 보아 대략 1150-1160년생일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한 세대에 18년 밖에는 되지 않는다. 몇몇 알려진 날짜만 따져봐도 그 보다 한 세대가 훨씬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1081년을 생년으로 잡으면 한 세대가 25년이 조금 넘으므로 훨씬 잘 맞는다. 이 경우는 우리 시조 이유성이 서경 부유수를 지낸 이유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유성 1081년생설이 틀리고 서경부유수 이유성이 맞다면 10대 이기종으로부터 시조까지의 기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일부 문헌으로 보면 중시조 이기종이 10세손이 아니라 8세손으로 계산되기도 한다. 후세에 정리하며 실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2세 이천소(倩笑) 태자첨사(太子詹事 - 종3품 동궁 근무), 평장사(平章事) 3세 이권(鬈) 우복야(右僕射), 평장사(平章事) 4세 이응송(應松)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 - 비밀 취급 종2품 5세 윤(昀) 정당문학 - 어떤 문헌에는 6세 연수가 응송의 아들로 나온다.
6세 이연수(李延壽)고려사에 나오는 기록들1222년 1월 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太尉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吏部事)로 임명. 1223년 1월 26일 수태보 주국(守太保 柱國)으로 임명. 1224년 1월 12일 이연수(李延壽)를 수태보(守太保)로 임명. 1227년 1월 26일 태자부(太子府)를 세우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연수(李延壽)와 참지정사(叅知政事)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책(冊)과 인(印)을 하사하였다. 1228년 2월 7일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연수(李延壽)가 사망하였다. (날짜는 양력) 문하시중은 최고의 관직이니, 후세에도 종종 언급되는 비중있는 인물이다. 다음은 사전에 나오는 내용. 이유성의 4대손인(족보에는 6세손, 어떤 문헌에는 5세손) 이연수(李延壽)는 고려 고종 3년 요(遼)[거란]의 침입 때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가 되어 이를 격퇴하였다. 또한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文下平章事)와 판리부사(判吏部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까지 올랐다.7세 이사청(志靑) - 우복야 (右僕射). 행정 수행 기구인 상서성에 딸린 정2품 8세 이득자(得滋) - 평장사. 의결기구 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 9세 이영분(永芬) - 전객시(典客寺). 중요한 손님을 모시는 일을 하는 관청이다.
10세 이기종(起宗)연경궁 제학(延慶宮 提學). 연경궁은 고려의 왕궁. 제학은 고려 때 정3품 벼슬. 이기종은 중시조로, 이 때 부터 집안이 홍주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모양이다. 이 때부터 묘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유교식으로 정비되어 위의 9대는 후에 가묘로 만들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홍주 이씨의 홍주 토성화는 유성의 9세손인 이기종(李起宗)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기종은 고려 충열왕때 등과하였으나,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관직을 버리고 홍주 수란동(현 홍동면 수란리)에 정착 홍주 이씨의 계보를 정리하여 가계를 세우며 입향조가 된다. 그의 묘가 홍동면 수란리에서 11km 떨어진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 선경에 있다. 따라서 현재 홍동면 수란리, 금당리 일대 홍주 이씨가 장손(금동파)이다. 이기종은 슬하에 장남 성(晟), 차남 서(舒), 삼남 표(表) 등 아들 셋을 둬 후손을 퍼뜨리며 홍주 이씨의 파를 형성하게 된다.
11세 이서(李舒) (1332-1410)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고려 고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연수(李延壽)의 6세손이며, 연경궁 제학(延慶宮提學) 이기종(李起宗)의 아들이다. 홍주를 관향으로 하게 된 것은 아버지 때부터이다. 문간공 이서의 묘 역사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며, 고려말 성리학(유교)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조선의 개국도 지지했었다. 후배들에게 겸손하고 권세를 뽐내지 않았다고 한다. 군부좌랑: 군부는 조선시대에는 병조가 되었던 "국방부"이고, 좌랑은 장관과 차관과 함께 팀을 이루는 실무 직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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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군파(海豊君派)의 평양 정착13세 해풍군 이사손(似孫)은 문간공(1332-1410) 이서의 장남 직장공의 아들이었다. 족보에는 문간공의 묘 앞에서 30보 떨어진 곳에 지석이 있다고 한다. 해풍군 사손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장남 이이(苡)는 진사(進士)로, 자손들은 평양성 밖에서 살며 외성파(外城派)로 알려져 있었다. 묘소는 평양 화원(花原)이 있다고 기록. 나도 어려서 외성파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초시 합격자도 없었고 족보를 유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둘째인 선전공(宣傳公)이천(薦)은 선전관으로 형제 중 유일하게 벼슬을 했다. 묘는 청운산에. 셋째 이위(蔿)의 후손들은 자산파(慈山派)라 한다. 14세손인 이 분 부터 20세 까지 대부분 평안도 자산에 묘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세손에는 정육품 관직을 지낸 이도 나왔으나, 21세손의 두 아들 이름을 끝으로 족보에 더 이상 기록이 없다. 즉, 외성파와 자산파는 기록이 끊겼고, 둘째 아들인 이천의 후손들이 해풍군파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해풍군의 아들들인 14세손들이 평양 지방으로 이주한 것이라는 기록이 된다. 이천의 후손으로, 15세손 이개지(盖地)는 무공랑(務功郎, 정7품)을 지냈으며 묘는 청운산, 16세손 이종형(従蘅)은 의교랑(宜敎郞, 종6품)을 지내고 묘는 강동 원당방 권당리 입암산(江東元堂坊權長里立岩山)에 있다 한다. 권장산도 근처에 있을듯. 17세손 아들 셋의 후손들은 관직을 하며 양반의 명맥을 이어갔다. 17세손 중 차남인 이석종(碩種, 1470-?)은 정략장군(定略將軍, 종4품)을 지냈으며 묘가 나도 들어본 적이 있는 권장산(權長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세손 이춘문(春文, 1494-?)은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다섯 아들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듣던 다섯형제 이야기가 이분들이었을 것이다. 해풍군 자손 분파도에도 이 다섯 형제가 나온다. 17세의 다른 두 분의 후손들도 많이 있다. 다섯 형제중 네명도 주요관직에 있었으므로 집안이 비교적 융성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5형제중 이희방(希芳)의 후손특히 우리 집안에서 다섯 형제 이야기가 중요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 이후로 나의 분파에 연속으로 오랫동안 독자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집안에 중요한 전설이 있다. 이춘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중에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와 같이 활동했던 분(아마도 다섯째 중 막내)으로 부터 명당 자리를 받아오게 된다. 그런데, 그 심부름을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잘 찾지 못하고, 나름대로 최대한 좋은 자리를 잡았다. 원래 자리는 3대 정승이 나는 자리인데, 이 사람이 잡은 자리는 12대 후에 3대 정승이 나는 자리였다고 한다. 이 사람은 후에 벼락 맞아 돌아가셨다는 전설이... 족보에 나오는 묘지 위치도 이런 전설 때문에 바로 12대 째였던 나의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벼슬길을 가도록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히 집안의 관심과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망해버리자, 증조할아버지는 아들과 집안의 미래가 막힌 것으로 생각하고 아까워 우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하에 신교육 받고 면서기가 되었더니 벼슬한다고 좋아하셨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면서기는 오래 하지 않았고, 삼일 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가출했으니, 10대 독자의 부모 마음이 아주 무거웠을 것이다. 나라의 정승은 아니지만, 할아버지는 감리교 목사님이었고 한국 감리교회 전체 감독도 역임 하셨다. 당시 선각자로, 1930년대에 미국 벤더빌트 대학에서 신학 학사, 그후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하셨다. USC에서의 박사 공부를 시작하셨으나, 6.25 동란이 터져 중단하고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훗날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그리고 현재 2대와 3대째 합쳐 6명의 박사가 나왔고 3대째 대학 교수가 있으니, 비록 3대 정승은 아니더라도 집안을 바로 세우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평양 근처 강동군에는 홍주이씨들이 많이 있었고, 이들은 족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족보가 유실되어 정확한 집안 내력을 모르는 소위 "외성파"가 있었다. 강동군에는 선산들이 있었는데, 권당산(일명 건뎅이)과 지장산이라는 이름들을 들어봤다. 해마다 모여 시제를 지냈다고 한다. 박덩골이라는 지명도 거론되었다. 이제 이를 기억하는 세대는 남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도 그저 어려서 듣던 이름들을 적어내는 것 뿐이다. 지금은 물론 다 사라져 없어졌을 것이다. 19세 이희방 할아버지 이후로 10대가 넘도록 나라에서 벼슬을 한 적이 없다. 게다가 10대 연속의 독자로 후손도 많지 않다. 가계가 끊어지지 않은게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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